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스티야 왕국 (문단 편집) === [[레온 왕국]]과의 통합 === 1230년, 레온 국왕 알폰수 9세는 메리다,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 공략에 성공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후 레온으로 향하다가 그해 9월 24일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와 [[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고,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국왕에 이어 레온과 갈리시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2년간 두 왕국의 통합에 반대하는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랐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모든 반란을 평정한 후 1233년에 왕국을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의 3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고 각 도시들과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형태로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